Mar 26, 2023
소크라테스의 세 가지 물음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존경받는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제자 한 명이 달려 오더니 “스승님, 친구 분에 관한 소문을 들으셨습니까?”라며 흥분한 목소리로 흉을 보기 시작했다. 소크라테스는 제자에게 진정하라고 했다. 나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이 퍼지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 자칫 흥분하기 쉽다.

그리고는 “소문을 얘기하기 전에 잠시 시간을 내서 내용을 걸러내는 삼중 여과 테스트(Triple filter test)를 해보자”고 했다. 사람의 말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다.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진실 여부가 검증된 후에 소문이 된 것이 아니다. 첫 번째 기준은 진실(Truth) 여부였다.

“지금 나에게 말하려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임을 확신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제자는 “아니, 뭐, 어디서 들은 이야기여서 그건 잘 모르겠는데—“라며 얼버무렸다. 과연 소문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는 사람이 있는가.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인이 필요하다. 소문에 대하여 확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럼 두 번째 테스트를 거쳐보자”라며 “네가 내게 전하려는 말이 내 친구에 관한 좋은 것이냐”고 물었다. 제자는 이번에도 “아니요. 좋은 건 아니고, 그와는 반대로 좋지 않은…”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현재 내 앞에 있지 않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무책임하게 말하는 것 자체가 내 자신의 인격에 치명적인 일이다.

소크라테스가 잠자코 있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내 친구에 관한 나쁜 소문을 내게 전하려 하는데, 그 진실 여부는 확신하지 못한다는 얘기구나. 세 번째 테스트다. 그 소문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이냐?” 제자가 어쩔 줄 몰라 하며 혼잣말로 우물거렸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스승님께는 쓸모 없는 것이기는 한데….”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반문하며 타일렀다.

“그럼 그걸 왜 굳이 말하려 하느냐? 그런 헛소문을 퍼뜨리며 뒷말을 하는 너 자신, 소문의 당사자인 내 친구, 그리고 그 얘기를 전해 듣는 나까지 모두 망가뜨리고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짓거릴랑 다시는 하지 마라.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에 주의해라. 네 말이 너의 침묵보다 낫다고 느껴질 때 비로소 말을 해라.”

언어는 모든 문제의 최종적인 결론이 되며 인생의 행불행을 시작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한 마디의 말을 하는 것도 듣는 것도 신중해야 하는 것이 마치 의사가 진단하고 처방하는 자세와 같다. 진단과 처방이 환자의 생사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양날 선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마음과 생각,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

사람의 말도 치명성을 갖고 있다. 하나님의 귀에 들린 대로 시행하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민14:28) 말이 생명을 갖고 있어서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을 때 마른 뼈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말씀이 선포 되었을 때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공허하며 혼돈한 상황에 천지 창조가 이루어졌다.

지금도 말씀에 의하여 우주 만물의 존폐와 명멸이 진행되고 있다. 일상적인 모든 대화와 언어에서 생사 화복이 결정된다. 돈 한 푼에 대하여는 벌벌 떨며 노심초사하면서 말 한마디는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부주의가 나의 인생과 남의 인생에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언어 한 마디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자세가 그의 인생을 돋보이게 만들었고 그를 위대하게 만들었다. 무엇이 위대한 것인가. 말 한마디가 위대한 것이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위대함을 웅변하고 있다.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전인적인 결론이 되는 이유는 그의 말에 그의 모든 것이 농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의 말을 할 때가 매우 위험할 수 있다. 첫째 질문 ‘사실인가?’ 둘째 질문‘내 친구에게 좋은 일인가?’ 셋째 질문’그 소문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인가?’ 소문의 위험성은 십중팔구 이 세가지 질문에 의해서 부적합하다는 결론이 나기 때문이다. 진리도 아닌 소문에 집착하고 열을 올리는 경박함이 나의 인생과 남의 인생을 파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