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세가지 수준(마7:11-12)
기도의 결과 –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기도의 결론이다. 기도보다 중요한 것이 응답 전과 응답 후의 태도이다. 하나님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응답 전과 응답 후가 어떻게 달라졌는가. 필요 해결 전과 해결 후가 같은가 다른가. 기도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이다. 하나님을 어떻게 대접하는가에 따라 나의 신앙 수준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문둥병자의 기도(나를 위한 기도) – 나를 위한 기도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자신의 문제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할 수밖에 없다. 모든 짐을 가져오라 하셨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요구 사항이 있다. 응답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다. 문둥병자의 믿음은 죽음을 각오한 믿음이었다. 율법에 문둥병자는 공동체에 나타날 수 없다. 철저한 격리가 율법의 규정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운집한 곳에 허락없이 나타나는 것은 처벌 대상이 되는 것이다.,
문둥병자의 기도(율법을 어기는 기도) – 기도에는 믿음의 증명이 필요하다. 믿음이 증명되지 않는 기도는 기도로서 효력이 없다. 믿음이 수반되지 않는 기도는 우상에게 하는 주문에 불과하다. 믿음의 증명은 믿음을 증명할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부자 청년에게는 재산 전체를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예수님을 따라 오라고 하셨다. 부모가 문제가 되는 사람에게는 부모를 버릴 수 있느냐고 물었다. 기도에는 믿음을 증명해야 유효한 기도가 된다.
문둥병자의 의무 – 문둥병을 치유받은 사람에게 주님이 요구하신 것이 있다. 사람들에게 소문내지 말라는 것이다. 단지 제사장에게 보이고 완치 판정을 받아 일상생활로 복귀하라는 것이다. 소문을 금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의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은 메시야, 그리스도이시다. 육신적인 문제 해결이 종교의 전부로 아는 미신적 신앙을 우려하신 것이다. 일반 종교는 단지 인간의 필요를 해결하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백부장의 하인을 위한 기도(남을 위한 기도) – 하인을 위한 백부장의 기도가 높이 평가 받는 이유가 있다. 백부장의 지위는 식민지 치안과 황제의 통치의 임무를 위임 받은 요직이다. 식민지에서 최고 지위에 있는 지휘관으로서 하찮은 노예의 질병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매우 귀한 일이기 때문이다. 신분에 걸맞는 대접이 상식인 왕정 시대에 노예에 대한 극진한 배려와 긍휼은 매우 감동적인 모습이다.
백부장의 하인을 위한 기도(남을 위한 기도) – 노예의 고통을 본인의 고통으로 인식하고 자비를 구하는 자세는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흡사하다. 이름도 없는 노예를 품는 모습은 죄인된 인류를 품는 주님의 자비의 넓이를 상징한다. 알 수 없고 만난 적도 없는 땅끝에 있는 한 영혼을 위해서도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역시 팔을 넓게 열고 모든 인생을 품고 기도해야 한다.
백부장의 하인을 위한 기도(남을 위한 기도) – 예수님의 칭찬을 들은 백부장의 믿음은 오직 말씀 중심 신앙이었다.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만 하소서. 명령만 하시면 하인의 병이 나을 줄 믿습니다.’ 군대가 명령 조직인 것 처럼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존재하는 조직이다.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구원하시고 하늘과 땅을 통치하신다. 오직 말씀만 하옵소서. 놀라운 믿음이다.
베드로 장모의 치유 – 마8장에 세 종류 사람의 치유 사건 중에 세번째 치유된 사람이 베드로의 장모이다. 다른 경우는 치유 요청이 먼저 있은 후 예수님의 치유 역사가 있었으나 베드로 장모는 반대로 먼저 그 집에 들어갔을 때 열병으로 누워있는 장모를 발견하게 되고 손을 잡아 치유하신다. 치유 때문에 방문한 것이 아니라 동행 중에 들러 치유하게 된 것이다. 기도의 궁극적 목적은 동행에 있다. 포도나무 비유의 핵심이 일체됨이다. 기도는 일체됨의 삶의 특징을 말한다.
베드로 장모의 치유 – 기도는 포도나무 예수님과 가지된 우리의 일체됨의 증거이며 삶의 형태이다. 기도는 방문이 아니라 동행이다. 필요에 따라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관계없이 함께 동거하고 동행하는 삶이다. 구원은 무능한 인생과 전능한 하나님의 일체됨이다. 행동의 일치가 존재의 일치를 말한다.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 지날 때 함께 하며 불 가운데 지날 때 함께 할 것이라 너는 침몰치 않으며 타지 않을 것이라(사43:1-2)
